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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화제인 드라마 '고려거란전쟁' 배경 및 전쟁과정, 전쟁 후 결과

데이터를 여행하는 현우쓰 2024. 1. 14.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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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KBS

고려 거란 전쟁은?

 

거란 전쟁, 또는 고려-거란 전쟁은 993년부터 1019년까지 약 26년간 세 차례에 걸쳐 고려와 요나라(거란이 주류 민족) 간에 벌어진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동아시아 역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적으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습니다.

 

서희, 양규, 김숙흥, 강감찬 등 여러 인물들이 활약한 이 전쟁은, 고려와 거란 양측에서 발해의 후예들이 참전하여, 동족 간의 충돌이라는 비극을 낳았습니다. 특히, 발해의 유민들은 이후 요나라와 여나라에 흡수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이 전쟁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을 넘어, 고려의 정체성과 중앙집권 국가로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고려 현종은 전쟁 중에 나타난 국민적 단결을 바탕으로 삼국 능묘의 정비를 통한 정서적 통합, 전사자 가족 지원 및 유해 발굴 사업 등을 통해 고려인의 정체성을 강화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전쟁 이후 고려가 단일 민족 국가이자 안정된 중앙집권 국가로 발전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전쟁의 규모나 중요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이 사건은, 고려와 거란의 관계, 그리고 동아시아 역사의 전개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려 거란 전쟁의 배경

 

고려와 거란의 관계는 고구려 시대부터 시작되었지만, 특히 고려 시대에 더욱 밀접해졌습니다. 거란은 당시 통일된 국가를 형성 중이었으며, 고려 역시 중요한 발전 단계에 있었습니다.

고려가 건국되었을 때, 현재의 몽골과 만주 지방에는 유목 생활을 하는 거란족과 여진족이 존재했습니다. 거란족은 야율아보기가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916년 요나라를 세웠습니다. 초기에는 고려와 거란 간에는 우호적인 관계가 있었으나, 926년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자 고려 태조는 발해 유민을 받아들이고 거란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고려의 북진 정책과 맞물려, 고려 태조는 거란으로부터 온 낙타를 만부교에서 굶겨 죽이는 등의 강경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고려 정종과 광종 시대에는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북방 국경 지역에 군사 시설을 강화하고 군사 체계를 개편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고려는 송나라와 화친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979년에 통일을 이룩한 송나라는 985년 고려에 한국화를 보내어 거란과의 공동 작전을 제안했습니다. 송나라는 또한 압록강 중류에 위치한 발해 유민의 독립국가인 정안국과의 해상 교류를 통해 거란에 대항하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거란이 국제적으로 고립되는 결과를 초래했고, 따라서 거란은 고려의 행보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요 태종은 후량과 후당과의 전투에 참여하여 연운십육주를 획득하는 등 초기 성과를 보였지만, 중국 남부 침공에 실패하고 급사한 후, 거란 내부에서는 수구파와 진보파 간의 정치적 대립이 발생했습니다. 이로 인해 고려와의 직접적인 충돌에 나서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982년 이후 정국이 안정되면서 상황이 변화했습니다. 요 성종은 986년 정안국을 멸망시킨 뒤, 991년에는 압록강 유역에 위구, 진화, 내원 등의 성을 건설하며 고려에 대한 침공을 준비했습니다.

 

 

고려 거란 전쟁과정

 

출처 : 나무위키

 

제1차 고려-거란 전쟁 (993년)

 

제1차 고려-거란 전쟁은 993년에 발생했으며, 거란(요나라)의 소손녕이 이끄는 대군의 고려 침공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전쟁은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요와의 교류를 목적으로 했습니다. 전쟁 중 서희는 거란의 소손녕과의 외교 담판을 통해 고려의 입장을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서희는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강조하며, 요나라와의 국경 문제를 논리적으로 반박했습니다.

서희의 외교적 노력으로 고려는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흥화진, 용주, 철주, 통주, 곽주, 귀주 등 강동 6주를 설치하여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이는 고려의 전략적 승리로,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와 국제 관계에 대한 서희의 탁월한 이해가 크게 기여했습니다. 전쟁 후 거란은 고려에게 선물을 주고 화해를 맺었으며, 고려와 송나라 간의 교류는 비공식적으로 계속되었습니다. 이 전쟁은 고려와 거란 사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의 국제 질서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출처 : 나무위키


제2차 고려-거란 전쟁 (1009-1012년)

 

제2차 고려-거란 전쟁은 1009년에 발생한 중요한 사건으로, 고려와 거란(요나라) 간의 대규모 충돌이었습니다. 이 전쟁의 주요 목적은 거란이 송나라와의 고려의 교류를 차단하고 고려와 거란 간의 관계를 재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거란은 이 전쟁을 통해 강동 6주를 되찾으려 했습니다.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 중 하나는 양규였습니다. 양규는 흥화진을 지키는 도순검사로 활약했습니다. 거란군이 여러 차례 항복을 권유했으나, 양규는 이를 거부하고 견고하게 방어했습니다. 그는 흥화진에서 700명의 군사를 이끌고 통주에 도착하여 약 1,000명의 군사를 수습했으며, 밤에는 곽주로 잠입하여 거란 병사들을 기습했습니다. 양규의 이러한 활약은 고려군의 사기를 북돋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거란군은 개경까지 함락시켰으나 고려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고, 병참선이 차단되면서 철수를 결정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양규와 김숙흥은 거란군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했으며, 이 공격에서 많은 피해를 입혔습니다. 그러나 양규와 김숙흥은 이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양규의 공로는 후에 인정받아 삼한후벽상공신으로 추봉되었으며, 그의 부인에게는 교서와 양곡 100석이 하사되었고, 아들 양대춘은 교서랑에 임명되었습니다.

제2차 고려-거란 전쟁은 고려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제시했으며, 양규와 같은 무장들의 활약은 고려 역사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제3차 고려-거란 전쟁 (1018-1019년)

제3차 고려-거란 전쟁은 1018년에서 1019년 사이에 일어났으며, 이 전쟁에서 강감찬 장군의 역할이 중요했습니다. 거란은 1018년 12월에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으며, 고려는 강감찬을 상원수로, 강민첨을 부원수로 임명하여 이에 대응했습니다. 고려군은 흥화진 전투에서 매복을 이용한 기습 공격으로 거란군에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거란군은 계속해서 고려의 수도 개경을 향해 진격했지만, 고려군의 청야 전술(방어 측에서 모든 군수물자와 식량 등을 없애 적군의 보급을 방해하는 전술)에 막혀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후 강민첨 대장군의 기병에 의해 연주에서 크게 패배했습니다.

최종적으로 거란군은 귀주에서 강감찬 장군이 이끄는 고려군과 맞붙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고려군은 거란군을 크게 격파하였으며, 이 전투는 귀주 대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강감찬 장군의 탁월한 지휘 아래 고려군은 거란군 10만 명 중 겨우 2천여 명만이 생존할 정도로 거란군을 거의 완전히 섬멸했습니다.

이 전쟁은 고려의 결정적 승리로 끝났으며, 이후 요나라는 침체기로 접어들었고 다시는 고려를 공격하지 못했습니다. 이 전쟁은 고려와 거란의 관계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의 역사적 질서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려 거란 전쟁결과

 

여요전쟁 후, 고려와 요나라 간의 관계는 외교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고려는 송나라의 연호 사용을 중단하고 요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기로 결정했으나, 요나라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국왕의 친조나 강동 6주를 반환하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고려, 송나라, 요나라 간에 세력 균형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동아시아의 정세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편, 고려는 북방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흥화진 북쪽부터 동해안까지 천리장성과 개경의 나성을 건설했습니다. 또한, 민간 차원에서는 사행무역과 밀무역이 활발했으며, 문화적 교류도 이루어졌습니다.